잇달은 단종 명작의 귀환으로 레고 커뮤니티들이 떠들썩합니다. 올해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가요. 10257 회전목마, 75192 밀레니엄 팔콘, 75144 스노우스피더, 작고 강했던 40308 레스터에 이어 급작스럽기까지 했던 10256 타지 마할의 재출시 소식은 많은 레고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음 타자에 대한 루머가 돌기 시작하더군요. 10221 SSD라나 10030 ISD라나, 내년에 두 개가 다 나올지도 모른다나 뭐라나...
이곳저곳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입니다. 해외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죠? 크게 보아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단종품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긍정적 반응과 "이런 식으로 계속 단종품을 부활시키면 콜렉션하는 재미가 없지 않느냐"는 부정적 반응으로 나뉘는 듯해요.
저는 약 1년 전에 올린 글에서 향후 재발매 행렬이 이어질 것으로 봤습니다. 2016년 여름 경부터 갑자기 풍족해진 재고 수량과 세일 행렬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며 그 원인이 중국산 짝퉁에 있다고 봤고 그로 인해 풍족한 재고, 단종주기 연장, 재발매 행렬, 할인의 일상화가 뒤따를 걸로 예상했었죠. 얼추 때려맞추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음은 무엇일까요. 레고의 2차 위기라도 오는 걸까요? 아니면 패러다임의 전환?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또 무엇이어야 할런지요. 하지만 설찬에 숟가락을 얹기 전에 사실관계부터 짚고넘어가도록 하죠. 정말로 단종품의 귀환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건지, 그리고 이것이 전에 없던 특이한 일인지부터요.
레고 재발매 논란에 불을 지핀 10256 타지 마할 [출처: Brickset]
단종품 귀환 행렬, 실화인가
레고의 재발매, 리뉴얼은 사실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시티, 크리에이터, 테크닉같은 기본 테마야 말할 것도 없고 스타워즈나 DC/마블 등의 인기 라이센스물도 만만찮지요. 동일한 소재를 대중소 사이즈별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내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UCS만 꼽아봐도 7191/10240 X-윙부터 시작해서 밀팔이 네 번째(UCS 명찰만 안 달았던 10198 탄티브 IV까지 치면 다섯 번째)예요.
대형 고급제품이라고 예외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적으로 '만번대'의 시초가 되었던 레전드 시리즈만 해도 20세기 후반 명작들의 재발매였어요. 10000 Guarded Inn과 10001 메트로라이너가 2001년에 나란히 나왔고 10039 독수리성과 10040 바라쿠다 등이 다음해에 이어진 바 있습니다. 이 외에도 10152 머스크 콘테이너 쉽은 10155로, 10213 스페이스 셔틀은 10231로, 3451 소프위드 캐멀은 10226으로, 10187 비틀은 10252로, 때로는 그대로 때로는 고쳐서 재발매된 사례는 상당히 많습니다. [P.S. 더 자세한 내역을 뽑아놓은 브릭셋 기사가 나왔네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것이 민감한 사안이 되고 말았습니다. 2년 전 10199/10249 윈터 빌리지 토이샵부터였던가요. 그리고 10188/75159 데스 스타, 회전목마, 밀팔 등을 거쳐 타지 마할에 이르고 있죠. 새로운 현상도 아닌 것이 새삼 논란거리가 되는 이유가 뭘까요? 타지 마할처럼 단순 리박싱에 그치고 말아서? 아니오. 상당한 수준의 리뉴얼을 거친 밀팔 때도 네가티브 측의 논리는 똑같았어요. 소재만 동일한 신제품으로 봐야 할 회전목마 역시 이런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근심 가득이었던지요.
대체 왜? 있는 그대로 다시 내든 뜯어고쳐서 내든 소비자 입장에서 무슨 손해를 볼 일이 있길래?? "결국 되팔렘들의 투덜거림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듯해요. 순수한 레고 매니아의 목소리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대략 재발매로 인한 희소성-소장가치-소유욕의 감소와 이로 인한 레고 붐의 쇠퇴, 나아가 레고 사의 2차 위기에 대한 우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남의 나라 대기업(그것도 “비상장 가족소유 기업” - 공홈에 써있는 그대로 옮긴 겁니다) 걱정해주는 소비자라니 충심이 장하다 하겠습니다만, 매니아란 원래 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도 지속가능해야 말이지, 영 엉뚱하고 지속되기도 어려운 방향으로 마냥 흘러간다면 같은 매니아 입장에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리고 저는 ‘빌더로서의 매니아’로부터 ‘컬렉터로서의 매니아’로 AFOL의 메인스트림이 바뀌어온 지난 십몇 년 세월이 결국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컬렉션 붐과 레고 르네상스
컬렉션 붐이 있으려면 그럴 대상부터 있어야 하는 법, 기원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세기의 전환기, 늦게 잡으면 2000년대 중반이 될 것 같습니다. 한국의 경우 본격적인 붐 형성은 사실 더 늦죠. 10189 타지 마할(2008), 10224 시청(2012) 등 다수의 고급제품이 출시 당시만 해도 악성재고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일 거예요.
연원은 그 유명한 레고의 '1차 위기'였습니다. 1932년 창립(이라지만 실은 시골 목공소에서 나무 장난감 몇 가지 만든 것) 이후 빌룬트는 긴 세월 동안 "레고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워주기 위한 완구 겸 교구"라는 원칙을 유지했죠. 1990년대까지의 '올드 레고' 대부분에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박스 디자인부터가 누가 봐도 애들 장난감이었고, 테마도 설정도 참으로 소박했고, 부품은 많아야 1000개 정도였습니다. 라이센스물이란 상상도 할 수 없었죠. 그리고 93년 이래의 10년 하락세와 파산 위기, 필사의 몸부림, 르네상스의 도래... 다 아시는 얘기죠? 이런 과정을 거쳐 이전과는 다른 몇 가지 흐름이 생겨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라이센스물과 고급제품입니다.
> 라이센스물: 스타워즈 테마의 역사적인 런칭이 1999년,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미키 마우스(2000), 해리 포터(2001), 쥬라기공원 III(2001)과 스파이더맨(2002) 1 등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요즘은 아예 안방자리를 차지해버렸죠. 심지어 테크닉마저 라이센스물이 각광받을 정도니까요.
> 고급제품: 과거에는 상상도 힘들었던 부품 수와 크기, 디테일, 가격을 자랑하는 물건들. 크리에이터 엑스퍼트 딱지로 수렴되고 있는 일련의 제품들 2, 스타워즈 UCS 시리즈, 테크닉 플래그쉽 세트 등이죠. 3450 자유의 여신상이 2000년, 첫 UCS인 7181 TIE 인터셉터와 7191 X-윙도 2000년, 첫 만번대는 앞서 말했듯 2001년, 첫 모듈러인 10182 까페 코너와 10190 마켓 스트리트가 2007년, 첫 파펑 플래그십인 8275 동력 불도저도 같은 해였습니다.
크리에이터 엑스퍼트 제품군의 로고와 아이콘. 어드밴스드 모델 등으로 중구난방 분류되던 것을 본사에서 그러모아 통일시키는 중.
어른들도 혹할 만한 이런 제품들, 다시 말해 비싼 돈 주고 사모아서 애지중지할 만한 물건들이 줄지어 등장하면서 '컬렉터로서의 레고 매니아' 층도 비로소 두툼해지기 시작합니다. 레고 사의 매출에서 성인 대상 고급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라고 합니다만 성인 팬들의 존재가 갖는 의미는 그 이상일 겁니다. 당장 아동용 제품의 결제를 누가 하겠어요. 레고에 대한 인식 전환, 파생산업의 견인 등 각종 파급효과도 상당하겠죠.(성인 팬들이 고급제품만 사는 게 아니라는 점도 놓쳐서는 안될 거구요.)
이들에 의해 본격적인 레고 붐이 조성되며 회사는 언제 파산 위기가 있었냐는 듯 너무 잘 팔려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행복한 십몇 년을 보내게 됩니다.
드리워오는 그림자: 레고의 라그나로크 Ragnarok는 오는가
그러나 라이센스물과 고급제품이라는 쌍두마차가 앞뒤 가리지 않고 내달린 결과 부작용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1. 가격 인상 : 고급제품이 비싼 건 당연하지만 제품 전반의 고급화를 견인해버린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요. 라이센스라면 말하나마나입니다. 통상 제품 가격의 15%를 라이센스 비용으로 지불한다니까요. 성인 팬들의 존재와 취향을 간파한 회사가 그들이 좋아할 만한 제품은 더 비싸게 판다는 의혹도 짙습니다. 특히 국내정발가를 보면...
호환품의 존재 또한 원인이 되는 듯합니다. 레고 부품은 (저작권이 아니라) 특허권의 대상인데 그 존속기간이 대다수 나라에서 20년입니다. 진작에 만료됐죠. 놓칠새라 메가블럭, 옥스포드, 코비 등이 추격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레고 사는 더욱 라이센스와 고급제품에 의존, 더더욱 다품종화, 새로운 부품의 양산 등으로 대응하는 모양이에요. 하나같이 가격 인상 요인들입니다.
그 결과 이게 장난감 맞나 싶은 가격표로 도배가 되어버렸고, 팬들마저 주저하기에 이르자 한 번 올린 가격을 내릴 수는 없는 일, 세일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제값 주고 사면 바보가 되는 구슬픈 현실.
2. 레고의 본질 퇴색 : 돈 주고 산 물건 잘 모아놓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겠어요. 그러나 제품 자체부터가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며) 노는 게 아닌 수집, 소장, 전시용처럼 변해간다면? 레고의 뿌리요 줄기랄 수 있는 클래식, 시티, 크리에이터 등은 이젠 거의 서자 신세입니다. 라이센스물과 고급제품은 물론 닌자고를 위시한 오리지널 콘텐츠물도 줄기로부터 마냥 멀어져가고 있죠. 미피 시리즈야 존재 자체가 그렇구요. 반면 올드 레고의 굵은 가지들이었던 3캐슬, 해적, 스페이스, 웨스턴은 대가 끊겨가는 중입니다.
다양화가 아니예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변한 거죠. 단적으로 닌자고, 키마, 넥소만 봐도 이걸로 어떻게 아이들의 창의력이 증진된다는 건지, 얼터너트 모델을 만들어보라는 건지 가급적 그러지 말고 하나라도 더 사라는 건지, 레고 맞는지 프라모델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죠. 제가 부모님들께 이 제품군을 안 권하는 이유입니다.
창의력 교구라며,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키워준다며, 크래글로 접착시켜버리지 말고 뭐라도 좋으니 만들라고 해놓고는(자기들이 만든 [레고 무비]의 '교훈'이었죠) 정작 제품은 반대방향을 향해가는 안타까운 현실.
3. 포화 상태 : 여러 측면에서이지만 폭주의 결과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먼저 제품의 포화. 신제품이 너무 많아요. Brickset의 브라우즈 페이지 하단에 잘 정리돼있듯 80년대 중반만 해도 1년에 100가지를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죠. 그러던 것이 90년대부터 200, 300으로 늘어나더니 요즘엔 한 해에 800가지가 넘게 쏟아져나옵니다. 사다가 지치고 사기 전에 질립니다. 4
그러니 신선도가 고갈될 밖에요. 소재의 포화입니다. 괜히 리뉴얼이 일상화되는 게 아니죠.(가격 올릴려고 멀쩡한 걸 리뉴얼시킬 때도 있는 것 같고...) 개선도 좋고 전종도 좋지만 영화에선 한 대뿐인 밀팔이 우리집엔 대체 몇 대냐구요. 배트모빌로 택시 회사를 차려도 되겠어요. 어쩌면 빌룬트는 헐리우드가 만들어주지 않는 새로운 소재를 내놓을 능력을 잃은 건지도요.
끝으로 우리집의 포화, 제일 대책이 없습니다. 아이들 거야 실컷 갖고놀다 동생 물려주면 되지만 어른이의 수집품이란 고스란히 이고지고 살아야 하죠. 하지만 창고조차 가득 찼다면? 고급제품들은 덩치도 왜 그리 큰지... 돈이 있어도 살만한 게 없거나 둘 곳이 없는 기막힌 현실.
4. 시장 왜곡 : 고급제품 등장 → 컬렉터층 형성 → 단종 프리미엄의 뒤에는 어쩔 수 없이 레테크, 리셀러, 짝퉁같은 단어가 뒤따르게 마련일 겁니다. 역으로 이런 현상들 앞에 저런 원인이 있다고 해도 좋을 테지요. 아무도 시티 경찰로 레테크를 하려 들지 않고, 다른 동네 리셀러들 역시 양상은 대동소이하다고 하니까요.
나머지 현상들의 맨뒤(이자 재출시 행렬의 바로 앞)에는 결국 짝퉁이 자리하겠죠. 조잡한 시티류 소박스가 서서히 늘어가는가 싶더니 2016년초 단종 모듈러를 시작으로 펼쳐진 레핀 등의 인해전술은 실로 경악할 만한 것이었습니다.(전에 올린 또다른 글을 참고해주세요.) 꿀이 흐르는 곳에 파리가 꼬이는 법이라는 불유쾌한 현실.
레핀으로 대표되는 중국산 짝퉁의 진격이 본격화된 것은 2016년 초였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변화가 유발되었다.
이쯤 되면 (기존)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북유럽 신화의 용어, 라그나로크가 연상되기 시작할지도요. 당장 떠오르는 것이 요즘 빌룬트의 위기에 관한 소식입니다. 올 상반기 매출이 6% 하락했다느니 1400여명의 직원을 줄이겠다느니 하는 뉴스에 레고 팬들은 애플 걱정하는 한국 기자들마냥 노심초사했더랬죠.
일시적인 현상일 뿐일지 르네상스 끝 내리막길 시작일지 봐야 알겠지만 그간 쌓여온 하중들이 만만치 않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회사 걱정이야 월급 받는 직원들께서 앞다투어 하실 일이고 우리는 우리 걱정부터 해야겠죠. 레고의 라그나로크, 만약 온다면 어떤 자세로 대처해야 변함없이 ‘잘 놀’ 수 있을지요.
어쩌면 맞을지도, 레고나로크 Legonarok
위에 열거한 부작용들은 피할 수도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십몇 년간 찬란했던 빛의 뒤에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그늘이죠. 너무 비싸고 너무 엇비슷한 제품을 너무 많이 내놓는 문제야 회사가 어떻게든 할테지만 정작 우리는요? 그 비싼 걸 그리 많이 공들여 사모으는 동안 돈도 공간도 재미도 메말라간 팬들 앞에 펼쳐진 재발매 행렬은 무얼 뜻하는 걸까요.
애초부터 부딪칠 수밖에 없는 벽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모든 컬렉션의 대전제라고 할 희소성이 레고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좋아서 모으는 거야 전종을 달성하든 온 집을 도배하든 자기 마음이죠. 그런데 이 컬렉션이란 것엔 희한한 주술이 걸려있게 마련이라서요. 하나둘 모으다 보면 점차 욕심이 커지고,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게 되고, 환산하면 얼마인지 자꾸 따지고, 처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법이지요.
"별로 관심 없던 제품이었는데 단종 직전이란 말을 듣고 급관심이 땡겼어요 / 정가 주고 산 게 아까워서 이번 세일때 또 사서 물타기했어요 / 우와 이 제품은 다섯 가지 모델을 만들 수 있다니 몇 개 더 사야겠네요 / 단종이 가까운 제품부터 먼저 구입하시기를 추천합니다 / 조립용이라면 몰라도 소장용이라면 역시 공홈 칼박이죠 / 어차피 한 번 만들고 나면 장식장으로 직행인데 내부 디테일보다 외부가 크고 화려했으면 해요 / 기체는 별로지만 미피 옷색깔이 달라졌으니 역시 또 사야겠죠 / 엉엉 역시 레고의 끝은 넓은 집인가봐요 / 피 주고 어렵게 구한 게 아까워서 미스박으로 모셔두고 있는데 재발매라뇨~~"
레고에는 본질적으로 희소가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소장가치도 별로입니다. 골동품, 미술품은 물론 기념품, 수공예품과도 길이 달라요.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어 전세계적으로 유통되는 공산품입니다. 공산품에서 희소성을 찾는 것부터가 난감한 얘기입니다.
그것도 '벽돌 찍어내듯이' 사출기로 찍어내는 플라스틱 조각입니다. 썩지도 않고 잘 닳지도 않아요. 차라리 티셔츠나 양말에서 희소성을 찾는 게 나을 거예요. 5
더구나 60년째 표준규격을 준수하고 있는 물건입니다. 동일한 부품이 얼마나 많이 나돌아다니고 있는지 브릭링크가 아주 잘 보여주죠.
그나마 부품의 특허권도 수십 년 전에 소멸되었습니다. 합법적으로 생산, 유통되는 다양한 호환품들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게다가 모든 제품의 설명서와 부품목록은 웹을 통해 공유되고 있습니다. 잘 규격화된 표준부품 + 무료공개된 설명서와 부품목록 = 무한정 복제의 가능성. 5004590 한정판 배트팟이 그 단적인 예죠.
5004590 배트팟(2015). 딱 1000개만 특별증정한 한정판이었지만 20만원 가량이면 복제 세트를 구입할 수 있다. 브릭링크를 통해 직접 시도한다면 15만원 밑으로도 가능하다. [출처: Bricklink]
"레고 세트를 조립해서 장식장에 두고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좋지만 한 달 후에 모든 것을 다 부수고 자신의 주머니에 모든 것을 뒤섞은 후 모두 바닥에 흩어놓고 자신만의 창조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뇌의 다른 부분이 활성화됩니다. 당신만의 창조물을 만들 때 상상력과 창의력 등이 계발됩니다." - 보 크리스텐센 前 레고 코리아 대표 (기사 원문)
마음에 드는 물건을 모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겁니다. 더 크고 정교한 걸 원하는 심리, 그렇게 모은 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전시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주객이 전도될 것까진 없다고 봅니다. 모든 장르에는 고유의 특징이 있죠. (박스 따위 북북 뜯어서 던져버린 후) 만들고 부수고 개조하고 창작하고, 기껏 열심히 꾸민 뒤 쿨하게 헤쳐모이는 거야말로 레고이기에 가능한 레고만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비슷한 속성을 지닌 책과 음반의 예를 들어볼까요. 수집으로 보면 오히려 레고가 명함을 내밀기 힘들 정도죠. 역시나 탈탈 털린 뒤에야 부작용의 늪에서 헤어나오는 사람 많습니다. 간단히 말해 어렵사리 구한 책/음반을 읽지도/듣지도 않고 마냥 쌓아두기만 하는 순간부터 좋은 취미 하나를 잃는 것이죠. 네, 해봐서 압니다.ㅠㅠ 그런 면에서는 MP3가 차라리 낫더군요. 아무도 음원 수집에 목을 매지는 않으니까요.
마찬가지일 겁니다. 너무 아까워서 혹은 너무 비싸서 뜯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두기만 하는 레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는데 한정판이 다 무엇이며 언제 또 나올지 모르는데 전종 달성 하면 뭐해요. 거꾸로 즐겁게 만들고 좋은 시간 보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재발매도 프리미엄도 나의 만족감을 앗아가지 못하는 거죠. 이런 게 진짜 ‘잘 노는’ 것 아닐까요.
거품 붕괴의 영향이 없진 않을 겁니다. 제품에도 유통에도 영향을 끼치겠죠. 어쩌면 독점체제마저 심각하게 흔들릴 지도요. 하지만 본령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브릭 빌딩이라는 우리의 취미는 건재할 거라 믿어요. 신화에서 라그나로크의 의미는 말세가 아니라고 합니다. 신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 폐허 위에 인간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라죠. 레고나로크, 어쩌면 이미 시작인지도 모릅니다. 기왕이면 거품 싹 걷어내고 처음 느꼈던 그 재미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이길요. 재즈도 요가도 그랬던 것처럼.
- 뒤의 둘은 원래 '스튜디오'의 서브테마였습니다. 스파이더맨은 다음해 독립해 레고 히어로물의 원조가 되죠. [본문으로]
- 모듈러 빌딩스, 국민차, 랜드마크, 윈터 빌리지, 놀이공원 등 여러 서브테마가 있지만 공식명칭과 세칭이 뒤섞여있습니다. 일부는 처음 나올 당시 아무런 테마도 안 달고 있기도 했죠. 그 중 리패키징된 것은 엑스퍼트 딱지를 뒤늦게 붙이기도 했습니다. [본문으로]
- 이건 라이센스물의 미피도 마찬가지죠. 아이들의 소꿉장난을 위해 등장했던 4cm짜리 인형이 이젠 어른들의 귀한 수집품이 되었습니다. 일부 인기템이 몇만원씩 하는 건 기본이고, 코믹콘같은 데서 푸는 한정판은 수십만원을 호가하죠. 박제된 곤충처럼 액자 속에서 움쭉달싹 못하는 그들을 보고 우디와 버즈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본문으로]
- 감안할 부분은 있습니다. 첫째, 프로모션품, 액세서리 등을 모두 합한 숫자입니다. 둘째, 옛날 제품의 경우 브릭셋 DB에도 계속 추가등재가 되고 있을만큼 상대적으로 누락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과거에 비해 몇 배가 늘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흔들리지는 않을 듯해요. [본문으로]
- 싸건 비싸건 의류는 아직도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내는 물건입니다. 산업 특성상 자동화가 불가능하다고 해요. 고작 바느질 → 수동식 미싱 → 전동 미싱으로 바뀌어왔을 뿐이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