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 브릭

대풍의 시대: 깨어난 공홈과 짝퉁의 위협

apparat 2016. 10. 25. 15:50

목하 대풍입니다. 소셜 커머스에서부터 슬슬 신호가 오기 시작하더니 대형유통점들의 진격, 급기야는 세계최약체로 조롱받던 한국 공홈마저 독점제품을 하나가득 구비하며 면모를 일신했습니다.

품목도, 물량도, 가격도 눈이 돌아갈 정도죠.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어디에 뭐 올라왔어요~ 달리세요~ 라고 쓰는 동안 이미 일품이네요ㅠㅠ"라는 게시물을 하루가 멀다 하고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공홈에 모듈러 하나 올라왔다는 따위로 구매정보 올렸다간 핀잔 듣지 않으면 다행이죠. 이게 불과 초여름부터의 변화입니다.


내내 궁금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크게 공급량 증대와 수요 축소의 두 갈래로 추정해볼 수 있을텐데 여기저기서 갑론을박이 한창입니다.


  • 여름은 비수기라 다 그렇다 -> 어느덧 늦가을입니다. 과거의 여름들과 많이 다르기도 했구요.

  • 비수기를 넘어 불경기다 -> 맞는 말이긴 한데 올여름 들어 갑자기 불경기가 시작된 건 아니잖아요?

  • 레고 붐의 거품이 꺼지고 있다 -> 꺼지기야 하겠지만 이렇게 갑자기는 아닐 건데요...


그러다 일각의 주장, 대륙산 짝퉁의 습격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짝퉁을 많이 사서 정품 수요가 줄었다는 얘긴데 자체로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여요.

혹은 중국인들이 자국 짝퉁을 사게 되어 대륙에서 남는 정품 물량이 한국으로 흘러들어오는 게 아니냐더군요. 더더욱 글쎄요.

문득, 다른 가설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짝퉁의 위협에 맞서는 레고의 대처방식이 공급량 증대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거죠.


이런 논리입니다. 몇 달 전으로 돌아가서, 예컨대 10243 파리의 레스토랑을 제가 너무나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냥 손맛이 너무 고픈 거죠. 근데 재고가 없어서 사질 못해요.

얼마 전까지 가능한 방법은 '피' 주고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리셀러 님들은 돈 벌어 좋고, 레고는 브랜드 이미지 관리돼서 좋으면 좋았지 손해볼 건 하나도 없죠.

그런데 대륙의 짝퉁이 등장합니다. 게임의 규칙 자체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레고 10243 파리의 레스토랑 (1층 일부)


그냥 등장이 아닙니다. 당장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시원치 않을 과거 몇 년간의 짝퉁 얘기도 아닙니다.

버젓이 모듈러를 복제하기 시작한 게 불과 올해 초 정도였어요. 그새 어디까지 왔는지 혹 소식 들으셨는지요? 모듈러 전종에 이어 테크닉 플래그십, 파워 펑션과 사운드 브릭이 포함된 회전목마, 에메랄드 나이트와 타지 마할과 한정판 배트팟에, 최신 대형제품들은 정품 풀리기도 전에 짝퉁이 먼저 돕니다.

놀라운 건 이 모든 변화가 1년도 안되어 후다닥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실은 놀랄 일도 아니죠. 수십층짜리 고층빌딩을 몇 주만에도 짓는 나라니까요.

(P.S. 중국산 짝퉁 자체에 관한 10가지 팩트 체크를 내용으로 새 글을 올렸으니 자세한 것은 그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짝퉁이 옳으냐 그르냐(옳을 리가요), 얼마나 쓰레기고 얼마나 사악한 자들이냐를 논하자는 게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많이들 성토해오셨고 다 옳은 말씀들입니다.(물론 윈도우와 오피스도 정품 쓰고 MP3, AVI도 불법다운받지 말아야겠구요. 사람이 적어도 앞뒤는 맞춰가며 살아야죠.)

이 글의 논점은 대륙의 이와 같은 대공세가 레고 유통질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느냐입니다. 하던 얘기로 돌아갑니다.


예컨대 파리의 레스토랑을 제가 너무나 만들어보고 싶어요. 재고가 없어요. 근데 짝퉁을 1/3 가격에 팔고 있어요.

처음엔 콧방귀를 뀌겠죠. 중금속 의혹, 결합력, 누락 부품, 색깔, 스티커, 미피, 이건 도둑질이야, 사면 나는 장물애비가 되는 거야 등등.

하지만 덕심으로 헤쳐나가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매니아들 자신은 애써 외면하려 하는지 몰라도 목줄이 달린 레코 담당자들은 아는 것 같더라는 얘기죠.


8월부터인가요? 일단 짝퉁은 통관 자체가 안되도록 조치를 취하고 나섰죠. 앞으로도 짝퉁 근절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겁니다.

하지만 한계가 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레코가 무려 1984년에 설립됐다면서요? 모르면 월급 도둑질해온 거죠.

그 정도로 막을 수 있다면 명품 짝퉁들 벌써 다 막았죠. 프라다, 구찌가 우습습니까? 브랜드 가치로 먹고 살기론 레고보다 열 배 스무 배인 이들이지만 고전하긴 마찬가지죠. 오히려 짝퉁을 방치해뒀더니 브랜드 가치가 더 상승하더라는 설도 (시중이 아니라) 학계에서 제기되어 있는 게 마케팅 세계의 오묘함입니다.

중국 정부를 압박한다? 단속을 강화한다? 아예 현지 공장을 턴다? 며칠이면 다른 도시에서 재가동 들어갈 수 있는 게 그들이라더군요. 이런 생각들은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합니다.


뭔가 다른 방법이 꼭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게 공급량 확대였던 겁니다. 실제로 만번대[각주:1] 짝퉁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시기와 공급량이 늘어나기 시작한 시기가 잇닿아있어요.

이젠 재고가 모자라면 브랜드 이미지는커녕 그대로 고객을 뺏기게 생겼으니까요. 어어 하는 동안 그야말로 순식간에 대륙이 턱밑까지 쫓아와버렸으니까요.

손놓고 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동호인이 아니라 월급 받는 직원들이 불철주야 리서치했겠죠. 그 결과 대처방식이 이렇게 나온 걸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2016년 9월 23일의 한국 공홈 '독점제품' 카테고리 화면 캡처. 높은가격순으로 정렬했습니다. 같은해 초여름만 해도 해외 공홈에서나 구경할 수 있던 이런 광경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죠. 지금 다시 들어가봐도 몇 가지 품목의 들고남이 있을 뿐 대동소이합니다.


만약 이런 가정이 맞다면 향후 몇 가지 변화가 예상됩니다.


  1. 지금의 대풍은 일시적 현상이 아닐 겁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다시 와도, 수요가 있는 한 물량은 계속 들어올 겁니다. 알람 울리면 몰려가고, 10분 내로 일품되고, "이번에도 놓쳤어요, 엉엉" 하는 풍경은 바이바이입니다.

  2. 단종주기가 길어질 수 있습니다. 팔만큼 팔았다 싶으면 냉큼 단종시켜버리곤 했던 관례가 깨지는 거죠. 고급품들에 한해서라도 수요가 있는 한 5년, 10년 계속 찍어내게 될 겁니다.

  3. 리메이크가 잦아질 수 있습니다. 75159 '언데드스타'는 그 신호탄일지 모릅니다. 이미 데스스타 II에 SSD까지 짝퉁이 나와있는 건 아시죠? 올해 안에 UCS 밀팔까지 낸다더군요. 우리보다 직원들은 열배 스무배 무서울 겁니다. 차라리 다시 내고 말죠.

  4. 할인행사도 잦아질 겁니다. 브랜드 가치를 생각하면 정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짝퉁 때문에 정품이 가격 내리더라는 얘기 못 들어보셨을 거예요. 대신 세일을 자꾸 하는 거죠. 이제 레고는 보이면 사는 거 아닙니다. 세일하고 프로모션 줄 때 사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레고 유통과 소비의 형태도 심대한 수준으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일반 소비자들이야 이리저리 재가며 정품도 샀다 짝퉁도 샀다 하겠죠. 매니아들은 한편으론 좋고 한편으론 싫겠군요. 사기 쉽고 싸진 건 좋지만 내 소장품의 값어치 역시 전같지 않을테니까요.

하지만 직격으로 유탄을 맞는 건 당연히 리셀러들일 겁니다. 아무리 사재놔야 단종도 안되고, 단종돼도 리메이크되고, 가격도 안 오르는 거죠. 한 마디로 이 장사는 끝났습니다.


이렇게 악순환인지 선순환인지 모를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됩니다. 그동안 수요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리셀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니 거품은 싹 걷히겠군요.

매니아들 또한 아무래도 예전만큼 다량구매는 안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3~4개씩도 사놓던 걸 1~2개로 줄이기 쉽겠죠.

그리고 인구절벽이 원인인 장기불황은 오게끔 되어있습니다. 그거 아세요? 최근 5년 사이에 초등학생 숫자가 10%가 줄었답니다. 레고 시장이 그만큼 준 거죠. 앞으로 더 줄 거구요.

하지만 물량절벽은 걱정 않으셔도 될 겁니다. 짝퉁의 그림자는 쉽게 걷히지 않을 것이고, 불황까지 겹친다면 더더욱 수급 균형은 안정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하는 거야 월급 받는 직원들께서 알아서 할 일이죠.


사실 어느 모로 봐도 거품은 걷히게 돼있습니다. 레고 붐이 지금보다 더 거세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레고 문화의 최전성기를 겪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 바로 그 레고의 드높은 인기(전세계적 차원의)가 짝퉁 대공세의 원인 또한 되었을 테고, 그에 대처하다보니 오히려 거품이 빠지는 역설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이겠죠.

따지고 보면 짝퉁의 대공습이 왜 벌어지겠습니까. 안 팔리는 물건을 누가 애써 카피하겠어요. 그만큼 장사가 잘 되고 있다는 반증이겠죠.


작년 한 해 매출이 자그마치 6조원이라는 대기업 걱정은 너무 안해주셔도 될 듯합니다. 이제껏 제대로 된 상품이 짝퉁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네요. 프라다든 아이폰이든 초코파이든.

다만 유통질서와 시장판도의 변화만큼은 불가피할텐데, 좋고 싫고를 떠나 이건 그냥 우리 앞에 주어진 또 하나의 거대한 흐름인 듯합니다.

별 수 있겠어요. 적응해야죠. 저같이 그저 취미생활일 뿐인 사람에겐 분명 낙원이 도래한 셈이지만요.


  1. 레고 사가 2001년부터 벌인 몇 가지 일때문에 생긴 명칭. 그 첫째는 인기가 높았던 단종품 몇 가지를 재발매한 것이고(일명 '레전드' 시리즈), 둘째는 스타워즈 UCS 시리즈를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제품번호가 다른 것과 달리 10000번부터 시작되어 새로 매겨졌고, 그 이후 많은 고급품들이 뒤를 이어 10XXX번으로 출시되면서 '만번대'의 명성이 쌓여갔던 것. 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도 1만번대 품번을 매긴 벌크 세트나 폴리백 제품이 나왔었고 요즘은 클래식, 주니어 등 영유아용 제품 또한 1만번대로 나오는 반면 스타워즈 UCS는 7만번대로 나오고 있다. 따라서 '만번대 = 고급품'이라는 인식이 정확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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