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SF 만화가 이루어낼 수 있는 한 극치, [잉칼]

apparat 2016. 11. 5. 02:07
  • 제목: 잉칼 - 존 디풀의 모험 Une aventure de john Difool (전2권)
  • 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 그림: 뫼비우스 | 번역: 이세욱
  • 출간: 교보문고
  • 출시: 2000년
  • 재출간: 2023년 아폴로 북스

 

국내 출간이 된 지 어언 16년, 절판된지도 벌써 여러 해, 그리고 중고 가격이 최초출시가의 몇 배에 이르면서 서서히 전설이 되어가고 있는 만화책, [잉칼 (원제: 존 디풀의 모험)]입니다.(*재출간 정보는 위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원작이 연재를 시작한 게 1980년이라고 하니까 1980년대 이래의 그 많은 SF/판타지물보다 한 발 앞서 있는 것이 본작이죠.

 

그림을 담당한 뫼비우스가 만화가일 뿐 아니라 영화 [에일리언], [제5원소]에도 참여했으며([제5원소]가 대놓고 [잉칼]을 참고한 영화라는 말도 많습니다) 요즘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파울로 코엘료 등의 책에서 삽화를 맡고도 있는 프랑스 그래픽 아트의 거장이라는 점, 글을 담당한 조도로프스키가 만화 작가일 뿐 아니라 그 기기묘묘했던 영화 [성스러운 피]의 감독이기도 하다는 점은 흥미거리를 넘어 본작을 이해하는 주요열쇠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 둘이 힘을 합친 이 작품은 한 마디로 SF 만화, 나아가 만화라는 장르가 이루어낼 수 있는 성과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화 [잉칼] 한국판 1권 표지

     

만화 [잉칼] 한국판 2권 표지

 

내용적으로 보면 SF, 모험, 판타지의 모든 장점들을 끝까지 밀어올리다 못해 드디어 그 윗단계라고 할 종교, 신비, 초월의 세계에까지 도달해버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반게리온], [매트릭스], 그리고 최근 사례로는 [닥터 스트레인지] 등을 통해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은 화법이지만, 1980년이라는 연표를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겠죠.

 

이 당시는 물질문명 발달의 극한치에 근접한 서양사회가 서서히 동양이며 참선이며 정신세계 등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터닝 포인트'에 본작은 깃발을 꼽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반환점을 돈 서양인들은 물론, 그들이 왜 우리를 향해 다시 뛰어오는지 영문도 모른 채 여전히 반환점이 종착점인 줄 착각하고 정신없이 내닫고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이 작품은 필독을 요합니다.

 

형식적으로 보아도 [잉칼]은 완벽한 작품입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놀라운 밀도에요. 이쪽에서 저쪽까지 걸어가는 걸 묘사하는 데에만 종종 한두 페이지를 소비해버리는 일본과 한국의 극화들에 비하면 본작의 컷 전개는 그 몇 배의 밀도를 보유하고 있죠. 두 권밖에 안된다는 사실은 이 점을 감안하고 받아들여야만 할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매 컷의 복잡성과 완성도를 짐작할 수 있을 텐데, 더구나 올 컬러판입니다. 페이지마다의 컷 구성도 천양지차여서 무슨 일련의 형식실험을 보는 것 같아요. 상업적 연재만화의 그렇고 그런 관습들과 정반대로 치닫는 이러한 특징들은 복잡하고 심오한 스토리와 화학작용하며 고도의 완성도를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좋은 질의 종이에 잘 인쇄된 한국판의 외양도 탐심에 부채질을 해댑니다. 번역은 능수능란하여 노련미까지 느껴지고 편집에도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아키라], [공각기동대], [총몽], [에반게리온] 중 어느 하나에라도 매혹을 느꼈다면, 혹은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인터스텔라] 중 어느 하나에라도 환호한 기억이 있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작품입니다.

 

소장하면 좋을 만화책 영순위에 놓아야 마땅할 테지만, 구하기 여의치 않다면 기회가 닿는대로 빌려서라도 보세요. 소장을 핑계로 탐독을 늦출수록 나만 손해를 보는 셈입니다. 세상엔 일본, 미국, 한국 만화만 있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아직 내가 감상하지 못한 SF 걸작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며 희열/겸양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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